이번의 프로젝트가 사연이 매우 많은 프로젝트라고요.
계속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했습니다. 아까는 제가 천국에 있었던 글을 쪘는데, 이번에는 지옥편입니다.
12일 저녁에 일을 받았는데 마감일이 16일입니다. CET 9:00로 우리나라 시간으로 16일 오후 5시쯤이죠. CET는 겨울에 쓰는 시간인가본데, 우리나라보다 8시간이 늦더군요. 런던에 있는 회사고 9:00면 자기들은 출근 시간이겠죠?
분량을 먼저 따져봤습니다. 멘땅에 헤딩으로 번역해야 하는 분량은 4000단어입니다. 제가 하루에 번역하는 분량이 대략 2500단어쯤 되니까 이틀 일하면 되겠네요. 그리고 퍼지매치가 약 13000단어 쯤 되는데, 이건 당췌 얼마나 걸릴 지 감이 안 잡히더군요. 퍼지매치 99%면 기냥 컨펌해도 별탈 없겠지만 퍼지매치 60% 70%대면 읽어보고, 고치고, 컨펌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전체적인 인상으론 시간이 안 모자랄 것 같더군요.
12일 저녁에 패키지 받아서 4시간 동안 트라도스 폴더 이것저것 열어보며 구경하고 메일에 인스트럭션이 적혀있고, 첨부된 가이드도 있어서 그것도 읽어보는데 썼습니다. 그래도 저에겐 13일, 14일, 15일, 16일이 있지않습니까?
13일날 10시간 일했는데, 번역한 건 별로 없었습니다. 트라도스가 익숙치 않아서 뭐 하나 건드리는 것도 다 조심스럽고 그렇더군요. 프로젝트 파일이라고 패키지를 하나 받았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번역해야 하는 지 계속 의심스럽고 마음이 찝찝하고 그렇더군요. 폴더 3개에 있는 수백개의 파일들을 다 번역하는 건, 아무래도 양이 너무 많아보이는 거에요. 내가 알기로 멘땅에 헤딩 번역은 분명 4000자 쯤인데. 이런 찜찜한 마음을 계속 안은 채, 트라도스를 조심 조심 누르면서, 조심 조심 번역을 했습니다.
파일 중에 progress상태가 90% 짜리도 있고, 0% 짜리도 있는데, 어느것부터 먼저 번역하는 게 좋은 지도 모르겠더군요. 90%짜리를 열어서 빨리 100% 로 완성하면 성취감이 클 것 같아 90%대의 파일도 많이 건드려봤는데, 내가 이렇게 빻아보고 느낀 건, 0% 짜리를 먼저 번역하는 게 좋더라구요. 진행률이 낮은 것들을 먼저 번역하면 진행률 높은 것들이 더 빠르게 완성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어느 파일을 먼저 열어서 번역하는 게 좋은 지 파악하는 데도 한참 걸렸습니다. 당연히 속도가 날수가 없지요. 13일날 10시간 일했는데 번역한 건 별로 없었어요.
14일날 11시간 작업했는데, 작업하면 할수록 이상하더라구요. 분량이 너무 많은 것 같이 느껴지는 거에요. 내가 완성해야 할 파일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4000단어잖아.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마음을 다독였죠. 그리고 또 프로즈 포럼에 보면 서구 번역 회사는 합리적인 작업스케줄을 제공한다는 평을 받더라구요. 여기가 런던 소재의 회사라 분명 안되는 마감일을 주진 않았을 거라고 믿기로 했죠.
그렇게 15일이 됐는데, 저는 아직도 3개의 폴더 가운데 첫번째 폴더에 든 수백개의 파일만 번역을 완성했을 뿐, 2번째 3번째 폴더도 번역해야 했어요. 내일이 마감인데 저는 3개중 2번째 폴더를 작업하고 있으니, 내가 일을 절반쯤 밖에 못 한 거죠. 아주 미치겠는 거에요. 시간이 모자랄 것 같다는 메일을 보내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그러면 또 생각해야 하는 게, 마감을 연장을 한다면, 몇일이나 더 받아야되나 하는 문제였어요. 간단치가 않은 게, 제가 19일 오전에 인도회사 잡오퍼를 수락했거든요. 16일 마감이 17일 18일까지 연장되면 19일 오전에 마감이 있는 인도회사 일에 지장이 갈 것 같았어요. 이러다가 두마리 토끼를 다 놓치게 되는 거 아닌가 불안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마감을 연장해달라고는 말 안 하고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걱정스럽다는 이메일을 보냈어요. (아래가 전문)
Hi,
Do you remember the three folders?
I am working on the second folder of files.
And I decided to work all night tonight.
But, I do not know if I can meet the deadline tomorrow.(16th CET 09:00)
If I am lucky, I will probably succeed in meeting the deadline closely.
But if I'm in a bad luck, I might not be able to meet the deadline.
Of course, I will do my best. I will never rest.
But now I am worried.
그러자 다음과 같이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답장이 PM으로부터 옵니다.
Are being serious?
If you do not meet the Deadline all of you work will go down the drain as this client is very serious and strict and WILL NOT PAY US AT ALL!
Why did you accept the job if you cannot meet the Deadline? And why are you telling me you cannot meet the Deadline 1 day before the actual Deadline?????
If you would've told me this a couple of days ago we would've found a solution, right now we do not have the time and resources.
Please MEET THE DEADLINE.
읽으면서 느낀 게, 이 메일을 요점은 결국 그거인 같아요. 니가 마감일을 준수하지 못하면, 니가들인 시간과 노력이 그 순간에 다 날아간다. 돈.은.땡.전.한.푼.줄.수.없.다. ( WILL NOT PAY US AT ALL! 부분)
이 답장을 읽자 마음은 오히려 편해지더군요. 마감일 연장은 없는 겁니다. 마감일 못지키면 그걸로 끝이에요. 프로젝트 자체가 날아가버리는 거죠. 돈은 땡전 한푼 없구요.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마감일 연장은 없어요. 마감 못 지키면 그걸로 끝이에요. 그렇다면 난 이 에이전시를 잃더라도, 인도회사는 건질 수 있겠죠.
그 전에 한국회사와 일할 때 어땠냐면요, 한국회사라고 다 그런 건 아닌데, 제가 같이 일한 회사가 유난히 영세하고 작업 환경이 나빴어요. 지킬 수 있는 마감을 안 줘요. 특히 영한번역이 심한데, 하루에 10시간씩 일해도 지킬 수 없는 마감일을 줍니다. 그리고 그 마감일이 찍찍 늘어나요. 언제까지 늘어날 진 아무도 모릅니다. 며느리도 몰라요. 가끔씩은 여태껏 작업한 거 다 포기하고, 그냥 이 프로젝트는 버렸으면 싶은데, 그것도 안됩니다. 일단 제가 착수했고, 고객은 악착같이 저에게 결과물을 받겠단 거에요.(고객이 거머리같다고 생각한 적도...)
그런 환경에 있다가, 마감 못 지키면 심플하게 프로젝트 홀랑 날라간다. 나는 다만 돈을 못 받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은 너무 편한 거에요. 마음은 편해졌지만, 몸은 결코 편해지지 못했습니다. PM의 메일에서 보듯, 저는 반드시 마감을 지켜야 하니까요.
15일날 저는 17시간 15분을 일했습니다. ㅋㅋㅋ오전 7:30에 일어나서 밥만 먹고 숨만 쉬며 일했죠. (쉽게 깨지지않는 기록이 될 듯). 원래는 밤도 홀랑 새려고 했어요. 16일 오후 5시까지 달리는 거죠.
그런 저에게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트라도스 느님이 저를 구해주신 거죠. 세번째 폴더를 작업하기 시작했는데, 파일을 여니까 으엉? 저절로 번역이 다 완성되는 겁니다. 세번째 폴더는 제가 번역할 게 거의 없더군요. 트라도스 매직을 경험합니다. 번역은 할 게 없는 데, 그럼에도 성가신 작업은 남아있었습니다. 자동으로 뜨는 CM과 100%매치 외에도, 퍼지매치들을 컨펌하고, 태그들을 다 처리했죠. (태그 때문에 컨트롤 +인서트 한 후, 컨트롤+엔터로 컨펌 이 작업을 수백번 이상 한 것 같습니다.) 일단 수백개의 파일을 일일이 죄다 여는 것도 큰일이었죠.
어쨌든 세번째 폴더의 트라도스 매직으로 저는 갑자기 천국을 경험합니다... 밤샐 필요도 없이 늘어지게 잘 자구요.
지금이 16일 오후 5:17분이네요. 드디어 CET 9:00의 프로젝트 마감시간이 15분 지난 겁니다. 'create return package'로 리턴패키지 만들어서 보내놨는데 아직 응답은 없어요. 출근 후 커피한 잔 하고 있는 건가요? (저는 'We Transfer'로 안 보냈구요. 리턴패키지를 구글 지메일로 보냈어요. 지메일로 10GB까지 파일 보낼 수 있네요? 구글 '드라이브'를 활용한 기능입니다. 구글 드라이브에 파일을 업로드한 다음 그 링크를 보내는 방식인가봐요. 관심있으면 한번 검색해 보세요.)
이번 프로젝트 어떻게 될까요? 일단 새로 번역한 4000단어의 품질은 괜찮습니다. 공들여서 했어요. 근데 시간이 너무 모자랄 것 같아서 퍼지매치를 읽어보지도 않고 마구 컨펌했습니다. 어찌될 지 모르겠네요. 하하하
그리고 만약 번역 품질은 괜찮다고 하더라도, PM에게 단단히 찍힌 것 같네요. (리턴 패키지 보내면서 어제보낸 언프로페셔널한 이메일 미안하다고 빌었어요. ㅎㅎ) 납기일 못 맞출 것 같다고 징징짜는 메일이나 보내는 제가 마음에 안들지도 모르죠. 이제 다시는 나에게 프로젝트 안 줄지도....
그래도 괜찮아요. 제가 프리랜서 번역가 외길인생을 가겠다고 굳게 다짐했거든요. 장사 하루이틀 할 것도 아니고, 이 PM이 일 안주면 다른 PM을 찾으면 되죠 뭐 ㅎㅎㅎ
저는 저만 발동이 늦게 걸리나 했는데, 이게 정상인가 보군요? 1/3 정도 끝나야 속도가 빨라지는거. kate님 말 들으니까 안심되네요. 근데 정말 짜투리일...능률도 안 나고 인보이스 쓸 때도 엄청 구찮고... ㅠ. ㅠ 엉엉
와 저도 이번 일하면서 초반에 효율안나서 못 끝낼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처음 3시간은 거의 리서치하며 비교하는데 다 썼고 그 다음 두시간은 어투랑 문장구조 잡는데 쓰니까 속도 1도 안나더라고요. 근데 번역을 하다보니 1/3정도 끝내고나니까 속도가 붙어서 호다닥 해치울 수 있었습니다. 프로젝트 받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들이는 시간만큼 속도나는 것 같아요. 번역 시작한지 1분은 1m/hr 30분은 30m/hr 200분은 0.2km/hr 요런식으로.. 그말인 즉슨 자투리 일이 가장 효율이 낮다는 말.....;;;ㅠㅜ엉엉
한 편의 영화를 본 듯 심장이 쫄깃해지네요.ㅎㅎ
저도 트라도스 작업할 때 아직도 조금 불안하거든요.
매번 쓰는 기능만 쓰고 그것도 기억이 안 날때는 유치원 PDF를 다시 읽으며 진행하고요.
어쨌든 잘 마치셨다니 다행입니다~! :)
파일 한꺼번에 여는 기능 제 기억에 트라도스 유치원에 있읍니다.... 여러 파일 선택한 다음에 열면 됨......
읽으면서 제 심장이 다 쫄깃해지는 기분이네요ㅜㅜㅜㅜㅜ너무 고생하셨어요! ㅜㅜㅜ 트라도스 하 증말 애증의 대상인거같아요..
읽으면서 조마조마했는데 해피엔딩이라서 다행이예요. ㅜㅠ 그런 메일을 받고 오히려 더 마음이 더 편해졌고 거기에 마감까지 다 지키셨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매일 메일을 열 때마다 긴장하는 저도 언젠가 그런 담대한 마음을 가지는 날이 올까요.
파일 잘 받았단 메일이 한참 전에 왔구요. 지금 시간까지 암말 없는 것 보니까. 별 문제 없나봐요 안심해도 되겠어요. ㅎㅎ
CET가 뭔가 했는데 겨울에 쓰는 시간이군요... 저그거 몰라서 큰일날 뻔 했었어요;; 그런데 저도 비슷한 일을 겪어서인지 같이 똥줄이 타네요ㄷㄷㄷㄷ 이메일에서 찬기운이 올라온다는게 무슨뜻인지 알거 같습니다..... 그리고 새삼 느끼는게, 언어공부도 좋지만 역시 트라도스 공부가 최우선인가봐요. 마지막에 읽는데 진짜 저도 모르게 눈물 흘리며 '다행이다... 너무 다행이야...ㅠㅠ'을 연발했습니다ㅠㅠㅠㅠㅠㅠ 너무 수고하셨고요, 혹시 에이전시 하나 날아가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다 같이 아직 초반이잖아요. 조금씩 나아질거라고 기대해봅니다!
아이고 읽기만 했는데 제 심장이 조이는 기분입니다. 저는 자잘자잘한 일을 당일 마감으로 많이 받아서 특히나 1월달에 매일 매일 스트레스를 대박 받았습니다. 주로 오전 10시 11시에 틱 날라오는데 거의 오후 네시 마감이라...단순한 내용이면 괜찮은데 이게 지난 번 오스카 와일드같은게 튀어 나오면 그야말로 마감 한 두시간 놔두고 똥줄이 타는 기분에...-_-
그래서 마감 좀 최대한 넉넉하게 달라고 PM들한테 징징대는게 입에 붙어 버렸어요. 사실 지금도 매일 스트레스의 연속입니다. 하. 매일 중간고사 쪽지시험 보는 기분이랄까. -_-; 작은 일 익숙하게 하다보면 큰 일도 능숙하게 해내겠죠? 다같이 화이팅입니다. ㅠ
생각해보면 위의 뻘짓이 제가 트라도스를 못해서 그렇습니다. 파일들을 한꺼번에 열어서 볼 수 있다는 그 기능을 쓰면 분명 작업율을 한번에 볼 수 있고, 자동 번역으로 다 해결될 부분이 표시되고, 남은 작업량도 확인할 수 있고, 그랬을 겁니다. 그랬다면 불안에 떨며 징징짜는 메일 보낼 일도 없었겠죠? 원래 무식하면 손발이 고생이라죠. 에효
트라도스에 파일 하나씩 열지않고 한꺼번에 열어보는 기능있다고 합니다. PM이 트라도스 2014와 그 이상 버전에 그런 기능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이제 프로젝트도 끝났으니까 그 기능을 슬슬 공부해봐야겠는데 뭘로 검색해야할 지 생각 좀 해보구요. ㅎㅎ
무사히 마감하셔서 다행이요. 으허 진짜 마감 다가오면 이걸 피엠한테 말해말어 심장박동 이상증세에 실시간 안절부절되지요. ㅠ전 요새 공격적 이력서 뿌리기좀했더니 어제 이런식의 어노잉한 이력서 자꾸 보내는너같은사람 정말싫어라고 답장받는 악몽을 꿨습니다. 흑 근데 저런 냉랭한 현실이멜받음진짜... 후..
맞아요 장사 하루이틀할것도 아닌데요모. 아 그리고 파일 하나하나 열지않구 한꺼번에 패키지로 묶어서 작업하는 기능 트라도스에는 없을까요? 저는 메모큐 그렇게 했는데 작업율을 한번에 볼수있고 반복문장도 보기 훨 편했어요.
헙... 저는 PM이 tomorrow라고 말해주는 바람에 날짜를 착각해서 하루 더 여유가 있는 줄 알고 띵가띵가 있다가 마감시간 직전에 깨닫고 허겁지겁 네시간만 더 다오! 하고 읍소하고 두시간만에 끝내서 보낸 적 있었는데 안 혼나서 별 생각 없었는데... 저도 이게 좀 느슨한 업계서 오래 일했더니 감각이 그렇네요. 반성해야겠습니다. ㅜㅜ
보람님 무사히 마감하셨다니 다행!!! CET는 Central European Time (제가 살고잇는...) 이구요, 데드라인 이후에 연락없으면 무소식이 희소식이죠 모!!! 일단 고기 먹고 힘내세요!